
덕수궁(德壽宮) (http://www.deoksugung.go.kr/)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다.

함녕전(咸寧殿: 모두가 평안하다)
-함녕전은 1897년 건립된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함녕전은 이듬해인 1905년 8월에 중건하였다. 이 곳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덕홍전(德弘殿: 덕이 넓고 크다)
-덕홍전은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한 전각으로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건물로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되어 있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 있다.





[좌] 중화전(中和殿: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우] 석어당(昔御堂: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석어당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갔다 환도한 후 거처한 곳이자 1608년 2월 승하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석어당 주련
海屋籌添壽八百(해옥주첨수일백) : 해옥(海屋에 산가지 더하니 수명은 팔백 세요.
瑤池桃熟歲三千(요지도숙세삼천) : 요지(瑤池에 복숭아 익으니 나이는 삼천 년일세.




정관헌(靜觀軒)
-정관헌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석조전(石造殿)
-석조전은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석조전을 1910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2014년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중화전(中和殿)



석조전(石造殿)
자료출처: 대한민국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http://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2)

고종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국왕(재위:1864년 1월 21일 ~ 1897년 10월 12일)으로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받다가 1873년 친정을 시작했다. 1875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을 하고 내정개혁 및 개화운동을 전개했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듬해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고종 황제는 광무개혁을 실시하여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였으며, 근대적 상공업을 진흥하고 공장과 은행 및 회사를 설립하였고, 발전소를 건설하여 전등을 켜고 전화를 개설하고 철도를 개통하여 전차를 운행했다. 또한 신교육을 보급하고 해외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전국의 토지 측량을 실시하고 모든 관리들에게 양복을 입도록 하고 단발령을 재개하는 등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을 뿐 아니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아들인 순종을 대한제국 2대 황제에 즉위하게 하였다. 곧이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고, 마침내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 제국에 흡수되었다.
일제강점기를 맞아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 머물면서 대한독립의군부 등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갑자기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승하하였는데, 이빨이 모두 빠지고 혀가 닳아 없어지며 몸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에 고종 독살설이 퍼지며 3월 1일 고종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에 3·1 운동이 발발했다.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고종이 만든 '대한'을 국호로 사용하고 고종이 도안한 태극기를 국기로 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법에서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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